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/사라진 팀 (문단 편집) === 역사 === '''친선경기의 세계 챔피언'''이라는 별칭이 있던 대표팀.[* 항상 평가된 전력보다 공식전 성과가 낮아 생긴 별칭이다. 그래도 올림픽 금메달은 물론 단 한번 올라간 월드컵에서 8강을 찍는 등 저력은 보여줬다.] [[제2차 세계 대전|2차대전]] 이후 생겨난 [[동독]]의 축구팀으로서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[[동서독 통일|재통일]] 하면서 사라졌다. 1949년 단독 동독 정부가 생기고 2년 뒤 1951년에 [[FIFA]]에 가입신청을 한 뒤 1952년 동독축구협회가 정식 FIFA 멤버가 되었다. 다만 분단 이전 독일 대표팀의 기록과 성적 등은 서독만이 이어받았다.[* 사실 원래 동독도 분단 이전 독일의 기록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. 독일은 분단된 뒤에도 [[1964 도쿄 올림픽]] 때까지만 해도 [[남북단일팀]]처럼 동서독 단일팀으로 나갔으니 축구에서도 단일팀으로 나가자는 말이 나오자, [[FIFA]]와 [[유럽 축구 연맹|UEFA]] 측에서 동독도 분단 이전의 기록을 서독과 공유하는 방식으로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정작 당사자인 동독 정부에서는 이것마저도 사실상 거부하면서 분단 이전의 기록 승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. 그리고 올림픽에선 단일팀으로 나간 것도 [[국제올림픽위원회|IOC]]에서 동독을 따로 승인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참가를 포기하거나 서독 쪽으로 붙어서 나가든지 하는 사실상 양자택일의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일팀으로 나간 것.(이마저도 말만 단일팀이지, 실제로는 올림픽 개막 전에 동서독 양측 선수들이 대결하여 이긴 쪽이 형식상 단일팀이라는 이름으로 나서는 방식이었다.)] 1952년 9월 21일 바르샤바에서 [[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|폴란드]]와 역사상 첫 A매치를 가져 3대0으로 졌다. 첫 홈경기는 1953년 6월 14일 드레스덴에서 [[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불가리아]]와의 평가전으로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. 본래는 월드컵에도 참가하지 않다가 서독의 [[1954 FIFA 월드컵 스위스|1954년 월드컵]] 우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1958년부터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기 시작한다. 최고 성적은 [[1974 FIFA 월드컵 서독|1974년 서독에서 개최한 월드컵]]에서 2라운드(8강)[* 8강 6위를 기록했으며, 당시는 8강 조별리그 방식이었다.]에 진출한 것이다. 유일한 진출 경력이 서독 월드컵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. 또 서독월드컵에서 개최국 서독과 조별리그에서 맞붙어 [[위르겐 슈파르바서]]의 골로 1대0으로 승리하는 파란을 연출하기도 했다. 하지만 2라운드 8강 조별리그에서 [[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|아르헨티나]]와 [[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|브라질]], [[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|네덜란드]]에게 차례로 발리며 탈락(대회 6등). 그 이후 다시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. 그래도 누가 독일 아니랄까봐 다른 국제대회에선 준수한 성적을 여러번 거두었는데 특히 [[올림픽 축구]]에 강했다. 1964년 독일을 대표하여 동독이 나가 올림픽 동메달을 처음 획득했고[* 당시에는 동,서독이 독일 단일 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하던 시절이라 동독과 서독이 서로 플레이오프를 벌여 이긴 팀이 유럽 지역예선에 출전했다.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이랬다.] 처음 단독으로 나간 [[1972 뮌헨 올림픽]] 동메달, [[1976 몬트리올 올림픽]] 금메달, [[1980 모스크바 올림픽]] 은메달을 획득하며 전성기를 달렸다. 청소년 대회에서도 곧잘 했는데, 1987년 FIFA 청소년 선수권[* FIFA U-20 월드컵의 옛이름]에서 3위를 하기도 했다. 당시 [[마티아스 자머]]의 FIFA 대회 데뷔무대. 1989 FIFA U20 월드컵 본선[*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]에 올랐으나 이 때는 조별리그[* 16강 조별리그] 탈락(12등). 1989년에는 대신 16세 이하 대표팀이 FIFA 16세이하 선수권 본선에 올라가 8강(7위)을 기록했다. 여러모로 독일의 이름값은 했다. 최다 출전자이자 최다 득점자는 [[요아힘 슈트라이히]]로 98경기 53골을 기록했다. 최장기 지휘 감독으로는 [[게오르크 부슈너]]가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전성기를 함께했다. 존재 당시 홈 경기장으로는 [[라이프치히]]의 [[젠트랄슈타디온]]을 주로 사용했다. 동독은 [[유로 1992]][* 마지막 8개국(8강) 본선 진출 유로 대회] 지역예선에서 서독, [[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|웨일스]], [[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|벨기에]], [[룩셈부르크 축구 국가대표팀|룩셈부르크]]와 함께 5조에 편성되어 지역예선을 치를 예정이었다. 오랜만의 공식 대회에서의 독일 더비로 관심을 끌었는데 1990년 8월 23일에 [[동서독 통일|독일 통일]]을 10월 3일에 하기로 결정되어 동독 대표팀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. 9월 12일로 예정된 [[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|벨기에]]와의 지역예선 첫 경기(원정)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친선경기로 그 성격을 바꿔 진행했고 동독이 2-0으로 승리하였다. 동독의 지역예선 잔여경기는 모두 취소되었고, 대신 서독 팀이 독일팀으로 바뀌어 남은 지역예선을 진행하였다. FIFA는 상황의 특수성을 인정해 모든 동독 대표팀 선수들에게 독일 대표팀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고, [[울프 키르스텐]], [[마티아스 자머]], 안드레아스 톰, [[토마스 돌]], 다리우스 보츠, 올라프 마르샬, 하이코 슐츠, [[디르크 슈스터]]가 통일 독일 대표팀으로 합류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